장편사화소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리성환 작《조상의 땅을 지켜》, 오늘은 쉰여덟번째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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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전문옆 숙위군 지휘처에 림시로 쳐놓은 군막안에는 강조이하 무장들이 비좁게 둘러앉아서 차후 처리안을 토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종장군, 치양을 잡아오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가?》
강조가 유방을 다그어대자 유방은 여유있게 대답했다.
《지금쯤 끌어오고있을것이오이다.》
《그놈이 귀법사로 도망친것이 적실한가?》
《합문사 유행간이 도망치는것을 숙위군사가 은밀히 따라가서 귀법사에서 치양의 행처를 찾아낸게 어제 밤 술시중엽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섰을것이오이다. 중랑장 탁사정이 직접 숙위군을 데리고갔소이다.》
《천추태후가 귀법사에 간것은 어떻게 알아내였소?》
《태후는 강시랑의 궁성밖으로 피하라는 조언을 듣고 거기로 간것이오이다.》
《강시랑은 무슨 심보로 태후를 빼돌리였소?》
강조는 오랜만에 만나는 은천을 퉁명스레 흡떠보며 묻는다.
《태후를 치양이와 떼놓으려고 그랬소이다. 복새통에 눈먼 칼에 잘못될수도 있고…》
《흥, 다심도 하시지.》
《그보다는 치양이 태후를 내세워 저들이 목적한대로 페하를 강박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 그랬소이다.》
《글쎄, 그렇다면 몰라라… 그래 페하의 병세는 어떠시오?》
강조는 은천에게 조금 풀린 눈길로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셨소이다. 중추원사께서 오시면 직방 알리라고 하셨소이다.》
《그런데 대량원군은 왜 아직 도착하지 않고있소?》
《치양이가 그쪽에도 군사를 증파해서 충돌이 일어 지체하고있었소이다. 그쪽도 완화되였으니 조만간 도착할것이오이다.》
유방이 정황을 설명했다.
《저… 중추사어른, 내전봉쇄를 풀지 않겠소이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고생이 적지 않았소이다.》
은천은 강조가 궁성에 들어오자바람으로 임금이하 문신관료들을 억류하라 한것이 사리에 어긋나는것 같아 속이 편치 않았다.
《강시랑은 그들이 치양과 한짝이 아니라는걸 담보할수 있소?》
강조는 은천의 제의가 리해되지 않는다는듯 흘깃 치떠보며 묻는다.
《그들은 페하를 지켜낸 사람들이오이다. 치양이 페하를 해칠가보아 지금까지 단 한발자국도 내전을 뜨지 않았지요.》
유방이 강조를 일깨우고나섰다.
《응당 그랬어야지. 페하의 총애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거요. 이렇게 합시다. 치양을 잡아오는 즉시 페하앞에서 목을 치고 그다음에 페하를 귀법사로 옮겨모십시다. 그다음에 대량원군이 오면 식을 갖추어 정식으로 모십시다. 유방장군은 이제 가서 최항과 채충순에게 새 임금을 모시는 례식을 준비하라 이르도록 하오. 우리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간단히 요기나 하고봅시다.》
강조는 기본고비는 넘겼다는듯 갑옷을 벗어던졌다.
바로 이때 《치양을 잡아들였소이다.》 하는 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을 끌어왔어?!》
강조는 걸상에 비스듬히 누운채로 끌려들어오는 치양을 쏘아보았다.
한참을 쏘아보고있던 강조의 입에서 된욕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주제를 해가지고도 마지막까지 치마폭만 찾아다녀? 예끼, 이더러운 놈! 아, 저것이 겁기라군 모기좆만큼도 없는 놈이군 그래. 원, 저런… 저따위놈이 우리 사내망신은 도맡아 해가지고있지 않는가, 저게 말이야. 야, 이놈아, 네놈것은 개를 줘도 안 먹을게다, 퉤! 이 더러운… 이놈아, 사람은 분수가 있고 경우가 있어야 한다, 이 개돼지만도 못한 놈아! 네까짓것이 감히 우리 고려왕조에 타성갈이를 하려들어? 이 천하에 덜된 놈!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강조는 숨도 안 쉬고 된욕을 련발하고는 술사발을 기울여 목을 추기고나서 명령했다.
《페하를 오시게 하라!》
임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비척비척 군막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치양의 자개물린 피투성이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페하를 바로 모셔라!》
강조가 다시 이르자 채충순이 허겁지겁 들고온 보료를 접어 걸상우에 걸쳐놓고 임금을 바로 앉히고 부축했다.
《태조이래 간신들이 적지아니 있었으나 저놈처럼 지독하게 임금을 우롱하고 찬탈을 추구한 놈은 일찌기 없었노라. 하늘이 굽어보고 응당히 벌을 내리라 하였으되 이제 저놈의 숨통을 끊어 만사람의 한을 풀어줄것이노라. 야, 너!》
강조는 치양의 옆에 선채 우들우들 떨고있는 패당 한놈을 가리켰다.
《네가 망나니를 해라!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죄를 덜 생각 있으면…》
놈팽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칼을 받아쥐고 한참 치양을 노려보다가 끙 힘을 쓰며 칼날을 휘둘렀다.
눈깜짝할 사이에 치양의 목이 쑥덕 베여졌다. 두눈을 흡뜬 놈의 대가리가 떼구루루 굴러떨어졌다.
강조는 계속해서 죄목을 따져가며 일곱놈의 목을 더 벤 다음 나머지 서른놈은 귀양지로 보내라 령을 내렸다.
임금은 눈앞에서 벌어진 피비린 광경에 넋을 잃고 굳어져있었다.
강조는 천천히 일어나 임금앞에 와서 털써덕 주저앉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 기유년(1009년) 봄 2월 무자일 묘시를 기점으로 페하의 정무가 끝났음을 알려드리나이다. 왕위는 페하의 어지대로 대량원군에게 양도하여 여한없이 이어가도록 최선을 다할것임을 삼가 맹약하는바오이다.
페하는 이제부터 양국공으로 상왕이 되시여 새 임금의 뒤를 살펴주시기 바라나이다. 거처를 귀법사로 옮기시고 태후마마와 함께 여유를 즐기시옵소서.》
왕송은 아무 말도 못한채 듣기만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겨우 한마디 《왕위는 내가 직접 선위하려 하였는데…》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어지에 다 밝혀주셨으니 재삼 곱씹을 필요가 없는줄 아오이다. 나라사직이 실패없이 잇게 된것은 페하의 공이로되 후세에 이 점에 한해서는 길이 찬양받을것이로소이다. 안심하소서.》
강조는 눈짓으로 임금을 모셔내가라 이르고는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왕송이 나간 뒤 이윽해서 강조가 대충 요기를 하고 입가심을 하고있는 때에 밖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군막을 들치며 황보유의와 문연, 강쇠와 김응인이 대량원군을 옹위하고 들어섰다.
강조는 황급히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나서 너푼 절을 하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새 임금을 모시게 되였소이다. 역적간신들은 깨끗이 제거되였으니 안심하시고 무지한 저희들을 새로이 이끌어주시옵소서. 그간에 노여운것이 있사오면 주저마시고 벌하여주소이다. 우리 몸은 페하의것이오니 처분대로 따를것이오이다.》
강조는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새 임금 왕순은 아무 말도 없었다. 눈마저 지그시 감고서 한손을 가볍게 들어 강조의 머리우에 멈춘채 굳어진듯 까딱도 하지 않았다.
강조는 슬며시 머리를 들어 새 임금을 쳐다보다가 자기 눈언저리에서 멎어서있는 그의 손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떠름해서 굳어겼다.
일어서라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으라는 소리는 더욱 아니고…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인가?
강조는 말할것도 없고 주위의 문무관료모두가 어리둥절한채 숨을 죽이고 새 임금을 주시했다.
《과인은 피로하여 잠시 쉴터이니 모든 대신관료들은 이미 하던 자기 일을 그대로 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슬며시 일어나 스적스적 걸어나갔다.
그 자리에 서있던 관료대신모두가 한동안 얼이 나간듯 까닥도 하지 않고 그냥 굳어져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새 임금의 첫 한마디, 자기가 이제부터 임금이라는것을 선포한 과인이라는 그 말만은 똑똑히 새겨들었다.
아직은 18살, 목종과 꼭같은 나이에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옹송그리는 모습을 볼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서슬푸른 기상을 하고 전 임금의 페위를 선언하며 천하제일의 위엄을 과시하던 강조마저도 자라목을 한채 눈만 껌뻑거리고있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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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장편사화소설 《조상의 땅을 지켜》를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쉰여덟번째시간이였습니다.